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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호 기관사의 이야기

철도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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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관사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나 새마을호를 운전해 지방의 여러 도시로 승객을 나른다. 주된 행로 중 하나는 서울발 부산행 경부선이다. 멀리 갈 때는 대구까지 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전까지 운행하고 교대한 뒤 일정 시간 휴식을 취했다가 서울행 열차를 인계받아 상행선을 탄다.

 경부선 서울~대전 간은 1시간50분에서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천안역에 도착하면 심리적으로 절반쯤 왔다는 생각을 하고 조치원을 지나 신탄진을 통과할 때면 이제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약간 풀린다.

 대전역을 앞두고는 여객 취급은 하지 않고 차량기지 역할을 하는 조차장역이 있는데 여기에서부터는 엔진 출력을 완전히 줄이고 대전역에 정차할 준비를 하게 된다.

 

 

 

죽음을 앞두고 무덤을 찾아온 코끼리처럼

 

그 런데 최근 이 조차장역을 통과할 때마다 자꾸만 차량기지 한편 유치선로에 서 있는 차량들에 눈이 간다. 이 차량들은 철도 용어로 PMC라고 부르는데 새마을호의 기관차로 쓰였던 차량들이다. 지금은 전기 동력의 최신형 ITX-새마을이 등장했지만, 과거 새마을호의 주력 기종은 양 끝에 유선형 디젤기관차가 달려 있는 것들이었다. 이 유선형 새마을호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끄는 형식이라 하여 푸시풀(Push-pull)형 동차라고 했고 줄여서 PP동차, 더 간단히 PP라고 불렀다. PP는 보통 8량 1편성을 기준으로 앞뒤에 운전실과 20여 석의 좌석이 있는 기관차가 있었고 중간에 5량의 객차와 1량의 식당차나 카페차가 연결돼 있었다. 수요가 많은 시간대에는 8량 편성 두 개를 붙여 16량을 연결해 달렸는데 이런 열차를 PP 중련편성이라고 불렀다. 16량이 연결된 새마을호는 정차역들의 승강장을 꽉 채우며 그 위용을 자랑했다.

 

새 마을호는 KTX가 들어오기 전까지 대한민국 최고 등급의 열차였다. 철도 잡지의 단골 표지모델이었으며 한국 철도의 상징이었다. 좌석의 안락함은 KTX를 능가했다. 체구가 조금이라도 큰 어른은 무릎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는 KTX에 비해 새마을호의 좌석은 비행기 1등석 부럽지 않았다. 기관사들도 새마을 기관사라고 하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다녔다. 초짜 기관사가 되어 역 구내의 열차 조성용 소형 기관차를 몰기 시작해 점점 경력이 붙어 마침내 새마을을 몰게 되면 땅 위의 마도로스요 파일럿이 되는 기분이었다.

 

PP는 현재 운행되지 않는다. 상용 운행이 완전히 중단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2013년 1월5일, 운영기관인 한국철도공사조차 무심한 가운데 철도 동호회원들만 서울역에 모여 조촐한 행사로 PP의 마지막 길을 환송했다. PP는 전성기 때의 화려한 모습 대신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슨 철판을 드러낸 낡은 모습으로 마지막 운행을 마쳤다.

 

 

30대 청춘을 함께 보냈던

 

이 렇게 사라졌던 PP의 기관차들이 대전의 차량기지 유치선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안쓰러웠다. 죽음을 앞두고 무덤을 찾아온 코끼리처럼 보였다. 자꾸만 마음에 걸렸던 것을 하늘이 알았는가보다. 새로 배정된 승무 스케줄에 운행을 마친 뒤 조차장역 차량기지로 무궁화호를 입고시키는 행로가 들어가 있었다.

 

차 량기지에 열차를 입고시키자마자 PP 기관차가 있는 곳으로 가봤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험한 몰골이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운전실로 들어갔다. 운전실 지붕엔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였다. 야간 운행 때면 조명이 은근히 분위기 있어 저절로 노래 한 곡을 뽑아내게 하던 계기판은 뜯겨져 있었다. 뽑혀진 나사들, 돌출된 배선들도 보였다. 운전실 바닥에는 발자국이 푹 찍힐 정도로 먼지가 앉았고 부기관사 쪽 의자는 아예 뽑혀져 있었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무전기의 수화기를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수화기 구멍마다 찌든 먼지를 안고 있었고 전화선의 피복은 벗겨져 안쪽의 전선들이 삐져나왔다. 운전실 뒤쪽 격문을 여니 엔진이 보였다. 엔진만큼은 묵직한 중저음으로 시작되는 특유의 디젤엔진음을 당장이라도 내뱉을 것처럼 보였지만 좀더 자세히 보니 곳곳에 상처를 안고 있었다. 동체 옆면의 상어지느러미 같은 환기판을 통해 들어온 태양의 빗살 두어 줄기가 차갑게 식어 있는 엔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필 름을 거꾸로 돌리면 엔진이 힘차게 돌아 열을 내고 계기판의 불빛이 환하게 들어올 것이다. 이 운전실에서 나는 30대 청춘을 보냈다. 저녁노을이 지는 낙동강을 끼고 달리다 구포역쯤 도착하면 폴더폰을 열어 부산역 앞 초량시장 단골 횟집에 전화를 넣어 회를 준비시켰다. 기관사 둘이 1만원씩 내면 횟집 주인아주머니는 회를 국수처럼 먹을 만큼 많이 썰어주었다. 늦은 밤 광주역에 도착하면 전남대 후문 쪽 번화가로 가서 치맥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숙소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목포에서는 이른 아침 유달산 산책을 마치고 아침을 먹은 뒤 서울행 새마을호를 몰았다. 장항선을 운행하는 중에는 중간 정차역의 열차 도착시간에 맞춰 중국음식을 시켰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먹는 맛은 최고였다. 예산역에서는 짜장면이, 웅천역에서는 해물짬뽕이 올려졌다. 이 PP동차의 기관차인 PMC 작은 운전 공간에서 만들었던 시간들이었다.

 

기 관사의 추억만이 아니다. 기관차가 태웠던 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터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러 가는 들뜬 시간이었거나 이별의 눈물을 삼켰던 공간, 친구들과 마주 앉아 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행길일 수도 있다. 두려움 가득한 입영열차였거나 신나는 휴가길이었을 것이다. 어색한 양복에 떨리는 심정으로 면접시험의 예상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취업준비생도 창밖의 풍경을 보며 잠시나마 긴장을 녹였을 것이다. 두 줄 철로 위에 남녀노소의 희로애락을 싣고 늘 듬직하게 달려주었던 강철 동체가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며칠 뒤 회사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조차장의 PMC에 대해 물어봤다. 현재 남은 55대의 기관차 중 44대는 재생을 거쳐 수출할 예정이고 재활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은 11대는 조차장에서 분해 뒤 폐기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고철로 팔려고도 해봤으나 워낙 고철값이 떨어져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기록과 보존에 취약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 걱정돼 박물관용이라도 보존하는 차량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딱 한 대를 보존용으로 보관 중이라고 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동체를 단 한 대만 보존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으나 지금은 구조조정 시대다. 수익이 최고인 사람들에게 역사나 문화의 가치 따위는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전화를 끊은 뒤 내가 본 동체가 곧 죽음을 앞두고 있던 놈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1993년 대우중공업생. 공식 명칭은 한국철도 전후동력형 새마을호 동차 PMC 254호. 녀석은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달렸으면 재생도 못할 정도로 몸을 버렸을까?

 

 

 

1980년대를 지나 21세기까지

 

새 마을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 전격 도입됐다. 잠수함에도 쓰이는 독일 엔진을 장착했지만 국내 기업의 손으로 만든 열차였다. PP가 첫 운행을 시작한 날은 7월6일이다. 6월항쟁이라고 부르는 1987년 여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식지 않은 때였다. 1987년 7월6일치 신문들은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다 전날 세상을 떠난 연세대생 이한열씨 기사로 가득 차 있다. PP는 민주화와 고도성장을 이루어냈다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이어 21세기까지 질주했다. 하지만 그 성장의 단 열매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겐 신기루처럼 보인다. 폐기 처분을 앞두고 쓸쓸히 누워 있는 옛 황제의 갈라진 몸뚱이가 묻는다. 흐려지는 맥박 속에 희미한 숨으로 묻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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